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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이야기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

by 미스오션 2012. 4. 23.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를 사람에게 쓸 수 있다면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1885)는 이 형용사를 받기에 적합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일찍이 앙드레 지드는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여, "할 수 없다, 위고다"라고 했다는데, 그의 이 평은 위고가 많은 인간적 내지 예술적 결함을 가졌으나 그의 위대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충을 피력한 말이다.

19세기를 거의 다 살면서, 이 긴 세월 동안 그는 위대한 시인, 위대한 극작가, 위대한 소설가, 위대한 사상가였고 또 위대한 투쟁가였다. 한때 그의 목소리는 프랑스 민주으이 양심과 감정과 희망의 울림판이었으며 그의 박애주의적 인도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전 유럽 사회에 빛을 던져주었다.

이미 14세의 소년 시절에 "샤토브리앙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라고 쓰고 문학에 뛰어든 그는 26세에 시집 <오드>를 출판하여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이래 1843년 장녀 레오폴딘의 익사로 인해 잠시 동안 문학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6권의 시집, 3편의 소설, 9개의 연극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시집으로서 <동방 시집>, <가을 나뭇잎>, <황혼의 노래>, <빛과 그늘> 등이, 소설로서는 <파리의 노트르담>, 연극으로는 <크롬웰>, <뤼 블라스>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정력적인 그는 쉴 줄 모르는 창작 활동과 동시에 열정적인 문학 활동도 폈다. 연극 <에르나니> 공연을 둘러싸고 일어난 고전파, 낭만파 싸움에서 사령관 위고는 학생, 문학 청년, 무명 화가들, 그리고 네르발이니 고티에 등의 20대의 젊고 전투적인 시인들을 동원하여 육탄적인 공격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당시의 쟁쟁한 시인, 작가들, 비니, 뒤마, 메리메, 발자크, 생트 뵈브, 네르발, 고티에 등을 자기 집에 모아 일종의 낭만파 문인 클럽 세나클을 조직함으로써 낭만파 운동의 총수가 되었으며 젊은 세대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1841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843년은 그의 생애에 전기를 이루는 해였다. 위고의 사랑하는 장녀 레오폴딘이 이 해 결혼한 지 얼마 후인 9월 4일, 남편과 함께 센 강 하류에서 보트를 타다가 보트가 뒤집혀 남편과 함께 익사했다.

졸지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충격으로 위고는 언어 상실증에 걸렸다. 겨우 1년 만에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으나 이 시기를 계기로 그는 문학 운동과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혁명적인 이상을 사회에 펴기 위해 정치에 깊이 관여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시인의 사명은 민중의 목소리가 되어 그들의 대변자 또는 인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의 결과 위고는 1845년 왕당파로 프랑스 국회 상원 의원이 되었고, 1848년 2월 혁명 후에는 파리 출신 제헌 의회 의원으로, 또 입법 의회 의원으로 활약하며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의 편에 서서 자유, 평등, 공화 체제를 위한 싸움에 가담했다. 드디어 군과 우익 정당을 배경으로 등장한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민주적인 헌법개정을 하자 위고는 그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가 되었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ㅓㄴ법을 정지하고 반대파와 공화파 의원을 체포할 때 첫번째 대상이 된 것이 그였다. 위고는 파리 시민을 봉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동료 의원 72명과 더불어 프랑스를 떠나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은 이후 19년 동안 계속되었다. 위고는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영불 해협의 저지 섬으로, 다시 고도 게르네지로 옮겨 이 섬에서 1870년 고국에 돌아오기까지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냈다. 이 동안 그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으로부터 두 번에 걸친 사면령과 귀국 권고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자유의 회복 후에야 비로소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 괴롭고 외로운 망명 생활은 그를 슬프거나 좌절케 하지 않고 도리어 그는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이 때에 창작 또는 완성시켰다. 루이 나폴레옹을 매도한 <범죄의역사>, <소 나폴레옹> 그리고 역사에 유례없는 추억의 시를 담은 서사시 <세기의 전설> 그리고 위대한 소설 <가엾은 사람들>, 평론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설 <바다의 일꾼들>, <웃는 남자>, 환상적인 서정 시집 <길과 숲의 노래> 등이 있으며 그 중 한 작품만으로도 가히 한 작가의 영광을 가져올 수 있는 명작들이었다.

위고는 나폴레옹 3세가 보불 전쟁에 패하여 퇴위, 망명하고 파리 시가 프러시아 군에 의해 완전 포위되기 직전 파리로 돌아왔다. 이 극적인 입성은 용감하고 희생적이었으며 파리 시민들은 그를 애국적 영웅으로 맞이했다. 이로부터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만년의 생활은 주로 창작 활동에 바쳐졌다.

비록 그는 다시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고 파리 지역의 상원 의원이 되었으나 정치에서는 실패와 실망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활동은 쉬지 않아 파리의 농성과 점령을 다룬 시 <끔찍한 해>, <할아버지가 되는 법>, <세기의 전설>의 보충편과 최종편 등의 시와, 과학 문제를 다룬 <나귀>, <정신의 네 바람>, 소설로서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야기를 다룬 <93년> 등 노년에 이르러서도 무한한 재질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1885년 5월 22일 83세를 일기로 죽고 프랑스 정부는 이례적으로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정했다. 6월 1일 그의 유해는 긴 국장 행렬 가운데 온 파리 시민들의 애도와 추모를 받으며 개선문에서 팡테옹으로 향했다. 가난한 사람의 영구차와 간소한 장례식을 요구한 그의 유언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위고의 작품에서 독자가 받는 강렬한 인상과 감동은 그의 다이나믹한 생명력에서 오는 변화무쌍한 창조력, 무진한 상상력, 강렬한 감정 등에서 온다. 이 거대한 창조력은 그로 하여금 시, 연극, 소설 등 여러 분야에서 창작하게 했으며 각 분야에서도 다양한 부문에서 작품을 써 그가 손대지 않은 문학 부문은 거의 없다.

시인으로서의 주된 힘은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은 무궁무진할 뿐만 아니라 머리 속에 상상하는 바를 실제로 있는 존재같이 정확 명료하게 보는 힘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는 서사시, 역사 소설, 환상극 등에 있어서 뛰어나며 자연이나 환경, 인물 묘사에 탁월했다. 구약 성서 시대의 인물들의 성격과 생활, 중세 기사들의 영웅적 모험, 나폴레옹 휘하의 군대의 전투 장면 등 세밀한 사항에 이르기까지 실제와 방불하게 묘사함은 풍부한 고증이나 사실보다는 강력한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시인 빅토르 위고에게는 치밀한 지성이나 분석적인 정신이 없는 대신 크고풍부한 감정과 감수성이 있었다. 차라리 그는 감정의 큰 불덩어리였다. 이러한 감정은 그의 작품과 생활에서 일차적으로 사랑으로 나타난다. 특히 가족에 대한, 그리고 어린이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으로 나타난다. 또 이 사랑은 확산되어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압박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박애 사상으로 번져 그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이렇게 강력하고 웅건한 상상력과 우주 만상에까지 펼치는 감정을 위고는 또한 천재적인 언어의 구사로 자유분방하게 표현했다. 그의 문장은 숨쉬듯 자연스러웠으며 강물같이 도도했으며 장엄 화려했고 많은 이미지를 동반했다. 이로써 그는 가장 비근 평범한 일과 사물에 생명을 주고 일상적인 행위와 감정을 승화시켜 우주적인 비전을 일으키는 마력을 지녔다.

물론 그에게 결점이나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상력이 지나쳐 때로 터무니없는 공상으로 흐르는 점, 위대와 장중을 좋아하는 허장성세, 웅변조, 지나친 언어의 기교, 대중에 영합하는 통속성 등 열거하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결점을 내포하면서도 그는 19세기의 프랑스 문단의 초고봉이었으며 프랑스 문학사의 빛나는 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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